두 달 여 전에 용건이 있어 어느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는데,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내 쪽에 비해,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렇게 반가워하지도 않고 묻는 용건에 아주 짧은 단답형 대답만 하시는 바람에 전화를 끊은 후 무척 당황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.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난 뒤 용건이 해결되어 알리려고 다시 전화를 했는데 역시 힘없는 목소리에 무성의하게 전화를 받았기에,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. 나한테 뭐 섭섭한 것이 있나! 내가 실수하여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나! 무슨 전화를 이렇게 받지! 시간이 지난 후, 목회자 모임이 있어서 그 목사님을 또 다시 만날 때 그 목사님의 표정이 어떨까? 내심 염려하며 모임에 나갔는데, 나와 전화 했던 일은 아예 기억에도 없는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,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님을 깨닫고 안도했습니다. 서로의 기도제목과 교회의 사역을 나누는 시간에 그 목사님이 지난달 금식기도 중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. 금식 중에 통화했기 때문에 목소리에 힘이 없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. 한 순간에 그 때의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. 목회자가 성의 없이 받은 전화를 놓고 혼자 여러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오해가 해결된 후 잠간 섭섭했던 일에 대해 자초지정을 이야기 했을 때, 목사님은 깜짝 놀라면서 눈웃음으로 미안함을 표시해 주었습니다.
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, 내가 느낀 대로 쉽게 결론을 내리며 살아갑니다. 입력 된 정보 뒤에 숨어 있는 내막을 모르기 때문입니다. 그래서 혼자 섭섭한 감정에 붙들리기도 하고, 혼자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, 정죄하기도 합니다. 그럴 때 조금만 눈을 돌려서, 상대방에게 지금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 믿어 주고 기다려 준다면,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오해가 자연스레 풀립니다. 한 가지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습니다. 나한테 섭섭한 감정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단정하면 이 후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오해를 뒷받침하는 재료가 됩니다. ‘당신이 그렇게 나와? 좋아 나도 관심 꺼버리면 돼’하고 단절하면 점점 더 상처가 깊어집니다. 설령 상대방의 부족과 성격으로 인하여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‘그럴 수 있지!’하고 이해 해 주는 여유가 필요합니다. 그러면 편합니다. 섭섭한 감정에 붙들리지 않아야 합니다. 선입관과 편견과 오해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, 상대를 무시하여 더 큰 갈등을 초래합니다. 더욱이 우리는 영혼구원의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깨뜨리는 어떤 일도 용납해서는 안되겠습니다. 상대를 이해하고 그럴 수 있지! 라는 넓은 마음으로 그 연약함을 감싸주는 자리에 함께 나아 갑시다.